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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법칙

djinal 2024. 2. 2. 00:55


죽음은 불편한 옷을 입고 딱딱한 침대에 눕는 것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일은 묵묵히 눈을 맞추거나 요란한 수돗물 소리에 울음소리를 섞는 것이었다.ㅡㅡㅡ지금껏 알던 삶이 언제든지 작동을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짐작할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 불확실한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시작점이 생겼으므로 종착점도 생겼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게 자신을 기쁘게 하는지 슬프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목표나 결의, 결심과 실행의 의지로 삶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멈춰 있는것보다는 나았다.ㅡㅡㅡ삶은 언제나 상상 이상으로 깊었다.어느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ㅡㅡㅡ"세상에서 제일 좋은 산 사람이야.""왜요?""좋은 데 왜가 어딨어? 사람이 젤 무섭다는 사람들은 다 자기가 무서운 짓 해서 그런 거다. 사람이 얼마나 좋은 건데. 말할 줄 알지. 말 들어주지. 말 시키지. 일해주지. 물건 갖다주지. 만지면 따뜻하지. 말랑말랑하고 부드럽지...."..윤세오가 오랜만에 외출한 사이, 집에 갑작스러운 가스폭발이 일어나고, 그 사고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아빠를 잃는다.하지만 그것은 사고가 아닌, 감당할 수 없는 빚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한순간에 모든것을 잃은 딸 윤세오는 자신이 다단계에 빠져 빚이 불어난것 때문은 아닌지 자책한다.한순간 가족과 집을 잃은 윤세오는 집에 찾아와 빚을 갚으라 협박하던 이수호에게 복수하기로 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던 중 이수호의 집근처 고시원에서 살며, 최소한의 생계비용을 벌기 위해 슈퍼마켓에서 일한다.중학교 선생으로 일하고 있는 신기정은 건방지고 오만한 학생의 악의적인 행동에 피해를 당할즈음, 한번도 친근하게 지내지 않았던 이복동생이 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는 경찰의 전화를 받게 된다.친하지도, 애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던 이복동생 신하정의 장례를 혼자 치르고, 그녀에게 있는 부채를 해결하고, 그녀의 삶을 추적해간다.그녀가 수차례 전화를 걸었던 상대는 다름 아닌 윤세오.전혀 접점이 없을것 같은 두 사람의 인연이 돌고돌아 윤세오와 신기정을 만나게 한다.그 외의 인물들인 부이,이수호와의 접점도 선명해지고... 인물들이 어떤 접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선으로 이어져 있는지를 추적해가는 과정은 마치 추리소설같은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시종일관 무겁고 어두운 내용과 상황들 때문에 제법 집중해서 읽은 책이기도 하다.가볍지 않은 내용, 세밀한 감정선들이 담담한 문체에 담겨 있다. 삶과 관계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선으로 계속 이어져 있는것은 아닐까.등장인물들은 깊은 관계는 아니지만 미세하게 모두 이어져 있다. 그런 미세한 관계가 파국을 치닫게 하기도 하고, 또 다른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편혜영의 전혀 새로운 소설!

네 권의 소설집과 두 권의 장편소설, ‘하드고어 원더랜드’ ‘악몽의 일상화’와 ‘일상의 악몽화’ ‘세계의 일식’ ‘동일성의 지옥’ 등 작품에 부여된 인상적인 명명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의 수다한 수상 경력들…… 십오 년간의 작품활동을 통해 더할나위없이 충분하게 자신의 소설세계를 보여준 작가의 신작으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마 우리가 편혜영의 소설을 읽기로 마음먹는다면, 그것은 이미 익숙하지만 한층 더 원숙해진 밤의 세계를 예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의 기미에 한없이 예민해지는 밤, 또 그 밤의 감각이 증폭시키는 일상의 악몽들.

하지만 떠밀리듯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십대 청춘에 관한 이야기라면 어떤가. 다단계와 사채업이라는 문제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다면 또 어떤가. 그리고 인물의 내면과 과거의 사연들이 겹겹이 쌓인 이야기라면, 그러니까 삶의 구체적인 풍경과 살아 있는 것들의 냄새로 이루어진 이야기라면. 세번째 장편소설 선의 법칙 말이다. 이 소설은 우리가 익히 아는 편혜영의 소설세계에서 무척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를 떠올린 순서대로 쓰였다면 첫 장편소설이 되었을 (‘연재를 시작하며’, 문학동네 2013년 봄호) 거라는 작가의 말에 귀 기울여본다면,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해온 것이 편혜영이라는 소설가의 전부가 아닌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신작에 늘 붙기 마련인 전혀 새로운 이라는 수식어는 지금 이 순간 전혀 빈말이 아니게 된다. 소설가가 애초에 품었던 하나의 점이, 십오 년이 흐른 지금에야 긴 선으로 이어져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